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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경기도태권도협회 한반도와 중국 대륙의 동쪽 만주주변 한민족의 부족국가에서는 영고, 무천,동맹등으로 불리운 제례에서 하늘을 숭상하는 가무, 유희오락을 통해 부족 단합과 많은 수확을 기원했다. 이런 큰 잔치 중의 가무, 유희는 자연스럽게 경쟁 의식을 갖게 되어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전제례행사인 올림피아 제전처럼 경기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부족의 방어와 세력확대를 위해서는 전투능력향상을 도 모해야 했으며, 자연스럽게 숭천제례의 신체활동은 투기를 중심으로 경기화되고 발달하게 되었다. 태권도는 이런 가운데 한민족 고유의 투기 형태로 생성되었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우선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주위의 많은 강적들과 투쟁을 계속하게 되었으므로 자연히 武를 숭상하고 용맹을 좋아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북방민족을 비롯한 주위의 적과의 투쟁과정에서 성장 발달한 관계로 신라나 백제보다 기력이 호전적이었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에 국가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2세기경 태조대왕과 차대와의 2대에 걸쳐 '선배'라는 제도를 형성 하였다. 이는 국가의 강성과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해 창설된것이었다. 조선상고사에는 태조 때에 와서는 매년 3월, 10월에 신수두대제(大祭)에 모든 군중을 모아 칼로 춤추고, 활도 쏘며, 앙감질도 하였다고 하였다. 또는 수박도 하며, 강의 얼음을 깨고 물속에 들어가 물싸움도 하였다고 한다. 대수렵을 행하여 잡은 양의 많고 적음을 보아 그 내기에서 승리한 사람을 '선배'라 칭했다. 선배된 사람에게는 국가에서 녹을 주어 그 처자의 생계를 유지케 하였다. 또 선배된 자는 각각 무리를 지어 한집에서 먹고 자며, 앉으면 고사를 외우고 학예를 익히며 나가면 산수를 탐험하거나 성곽을 쌓거나 도로를 닦고 군중을 위하여 강습하거나 일신을 국가와 사회에 바쳐 모든 어려움을 사양하지 않았다. 고구려 당시에는 각종 지위가 출신에 의한 세습제였으나 오직 선배만은 출신의 미천이 없어 학문과 기술로 개인의 지위를 정하는 까닭에 훌륭한 사람이 많이 나왔다. 백제는 삼국 중 고구려나 신라와 같이 태권도 실시에 대한 실증은 희박하다. 그러나 삼국이 세력 다툼을 하던 시대인 만큼 백제는 건국이래 공격과 방어의 전쟁이 끊임없었으므로 무예의 필요성을 느꼈을것이다. 백제는 외세의 침공을 방지 하는데 온갖 힘을 기울였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격검술이 널리 성행했다. 특히 고구려에서 힘찬 태동을 본 택견은 백제에 이르러 이웃 신라와 함께 태권의 개화기를 맞게 되고 부락마다 태권에 의한 우열을 가름하는 민속놀이로 유행했다. 신라의 무예로는 화랑도를 들 수 있다. 이는 진흥왕이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모방하여 풍류도란 민간청년 단체를 재정비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화랑도는 무사도의 용맹과 충효를 기조로 국가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희생정신이 강하였으며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를 바탕으로 삼아 인격도야와 심신단련에 힘써 국가를 이끌어 갈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다. 조선 상고사에는 "화랑도는 고구려의 선배 제도를 본뜬 것으로 수박, 격검, 기마, 덕견이, 깨금질, 씨름 등 각종 경기를 하며 원근산수를 탐험하고 시가와 음악을 익히며 공동으로 한곳에서 숙식하며 평상시에는 환란구제, 성곽이나 도로수축 등을 맡고 전시에는 전장에 나가 죽음을 영광으로 알아 공익을 위하여 몸을 바치는 것이 고구려의 선배와 같았다" 고 하였다. 고려는 역사상 상고시대와 근세를 이어주는 교량역할을 하는 동시에 삼국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중추 역할을 하였다. 고려의 태권도는 궁내, 군부, 서민생활과 밀착되어 발전되다가 무신에 대한 경시와 학대가 극히 심해지자 세도있는 무신들이 사병을 훈련할 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 하면서 더욱 더 조직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체계화되기 시작한 태권도는 보다 조직적으로 다양하게 발달 되었고 권법, 창법, 봉법이 융합된 특이한 태권도 형태로 발돋움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 고려시대의 태권도(수박)는 그 기술이 매우 발달되어 군사는 물론 일반인에게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태권도가 무예적 가치를 인정받아 벼슬과 직결될만큼 무인의 필수무술이 되었으며 기술과 위력도 인명을 위협할 정도의 무기의 수준에 도달하였다. 수련의 형태 또한 실전에 응용할 수 있는 집단 대련으로 발전하였다. 거란, 여진, 몽고 등 북방민족의 침략을 받으며 말기에는 왜적의 침략에 시달리기도 하였으므로 국방능력과 전투기능을 필요로 하는 한편 무사적 불굴의 정신도 요구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의 태권도는 수박이라는 이름으로 무인정치시 사병양성 차원에서 무인들이 실권을 쥐고 있을때에 매우 성행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무예를 중시하여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주력하였으나 화약의 발명에 따른 새로운 무기의 사용도가 높아지고 군대조직이 정비되자 태권도와 같은 맨손 무술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유교의 이념을 국시로 삼고 배불숭유의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연등회, 팔관회 등 국가적인 행사가 폐지되고 무예의 진흥은 많은 타격을 받았다. 조선 전기으 특이한 점은 수박이 무사의 개인 호신술로서, 그리고 기본무예로서 계승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수박의 사회적 위치는 고려시대와는 달리 하급무사들이 하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수박과 더불어 다른 무예도 경시되었다. 문화와 당쟁에 휘말린 위정자들과 선비들은 무예를 무시하고 무관심하다가 임진왜란을 겪게 되었다 이에 조선은 군제를 재정비하고 창, 활, 검 등의 일정한 방침 밑에 체계적으로 훈련시키기 시작하였다. 서울에는 훈련도감을 두고 5부으 장정을 뽑아 무예를 가르쳤으며 지방에는 호관 또는 속오군을 두어 군사기술을 가르쳤다. 정조 때 이르러서는 무예수련을 장려하였으며 이덕무, 박제가 등을 시켜 '무예도보통지' 라는 무예서를 만들었다. 무예도보통지 제4권에 권법이라는 이름으로 택견의 품새와 동작을 싣고 있다.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한 방책으로서 체육을 행하기 시작하자 일본은 운동회나 택견을 비롯한 민속놀이 등을 금지하였다. 일부 사범들에 의하여 비밀히 전승되어 내려왔으나 자연히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택견은 전쟁의 양상이 달라지고 시대가 개화함에 따라 군사적 무예적 성격 보다는 민속경기나 유희적인 것으로 실시되었다. 일제치하에서 다른 운동종목도 마찬가지지만 태권도는 민족정신을 말살시키려는 잔혹성 때문에 더 없는 박해를 받았다. 일본 총독부는 우리의 주체성을 파괴하기 위한 전략으로 집단 스포츠, 무예 또는 문화적 활동을 극심하게 탄압하였다. 몇몇 무예 사범들은 비밀리에 그 기술을 연마하고 가르쳤으며 이런 지하 움직임을 통해서만 한국의 무예는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일본은 체육운동을 전쟁목적에 결부시켜 '조선체육진흥회'라는 체육통제기관을 발족시키고 체육 운동을 국가산업 이라는 미명 아래 체육운동을 완전히 통제했다. 이렇게 해서 각종 체육 관련 단체가 해체되었을 뿐 아니라 체육대회도 모두 중단되어 스포츠계는 그야말로 암흑시대를 이루게 되었다. 광복 직후에는 주로 사범 중심으로 수련하였는데 당시에는 청도관, 송무관, 연무관이 대표적인 도장 중심의 수련단체로서 활동하였다. 그러면서 6.25를 거치고 1955년 드디어는 각계 인사들로 구성된 명칭제정회의 에서 '태권도'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하도록 결의하였다. 그 즈음에는 40여개의 군소도장이 난립하였고 각 도장마다 심사 및 시범연무대회를 따로 개최하였다. 1961년에는 각 관을 통합해 연합기구로서 대한태수도협회가 창설되었다가 1965년 8월 5일 대한태권도협회로 개칭하고 그 해에 제 45회 전국체육대회에서 부터 태권도 경기가 시작되었다. 1972년 에는 태권도협회중앙 도장인 국기원이 준공되어 태권도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그후 1973년 5월 28일 세계태권도연뱅(WTF)을 창립하여 1974년 10월 18일 제 1회 아시아 태권도 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고, 1973년 5월 25일 세계태권도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했다. 이제 태권도는 142개국의 4천만명이 가입한 세계에서 널리알려진 스포츠 중의 하나가 되었다. 태권도 세계 선수권대회와 태권도 아시아 선수권대회는 지금까지 10번 열렸다. 태권도는 한국의 서울에서 열린 88올림픽과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92올림픽의 시범종목이었으며, 1994년에 국제 올림픽 위원회가 오스트레일리아의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했다. |







